“회화, 견고한 불완전체”
회화는 내게 가장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이다. 예를 들어 내가 몸소 느끼는 일상의 ‘지루함’은 페인팅이라는 행위를 통해 ‘불안’과 ‘폭력’이라는 변형된 모습으로 캔버스 위에 드러난다. 이러한 회화적 언어는 복잡한 질문과 연구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대답을 주기도 한다.
내가 회화를 고집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회화는 철저하게 계산적 이거나 논리적인 언어가 아니다. 마치 암호 체계처럼 수만 번의 반복된 시도에도 풀리지 않는가 하면 첫 번째 시도에 너무 허무하게 풀려버리기도 한다. 따라서 이 언어는 순서, 규칙, 질서를 따를 수 없다. 오히려 변칙과 위반 그리고 초월이 가능한 언어이다.
<face-scape(얼굴-풍경)> 연작을 포함하여 최근 진행중인 회화 작업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심리적 공간의 붕괴와 치유의 순환 과정을 공사장에서의 작업 방식(쌓기와 허물기, 조립과 해체, 수직과 수평)과 병치시킨다. 실패를 포함한 작업 과정이 중첩된 이미지로 드러나는 미완의 공간을 표현하거나, 그 위에 인물의 형상 혹은 표정이 겹쳐진 반추상 회화로 나타내고 있다. 작업 과정에서 물감은 쓸리고 긁히며 캔버스 위에서 생채기를 내고 이미지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그 표면 위로 실수로 튄 물감 자국들과 덩어리들이 두툼하게 얹혀지고, 때론 몇 년 전 실패한 그림 위에 이러한 과정을 덧입힘으로써 전혀 다른 이미지를 생산한다. 이 작업은 나 혹은 동시대인들이 버텨내야 하는 변화의 속도와 도시화의 폭력적인 순환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나타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며, 폐허와 유토피아가 공존하는 공사 현장과 같은 현 사회를 살아가며 느끼는 보이지않는 불안과 권태의 실체를 재현하려 한다.
- 구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