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c Insik (1919-1988) was an artist truly ahead of his time and an innovative artist who lived most of his life in Postwar Japan. He delved into the concept of materiality and produced pioneering works that experimented with objects such as glass, brass and paper far in advance of related discussions in Japan that preceded the development of Mono-ha and arte povera in the West. Quac’s work was a major influence on the Mono-ha movement and he is well known to be an artistic mentor to Lee Ufan.
Memories of his childhood in Korea and the materials from that time heavily influenced Quac’s work and his focus on the natural versus the man-made. The idea of the material and matter and the essence inherent within led the artist to explore objects such as glass, stone, brass, and paper. In many works, the artist broke glass and glued them together again or cut brass plates only to sew them together or drilled holes in stones and canvases. Quac also focused on simple forms and shapes, such as dots and circles, that inhabit the canvas in clusters with perceived depth. Quac stated, “a countless myriad of objects exists in the universe, I seek to halt all acts of expression and listen to the words uttered by objects.” In contrast to Mono-Ha, Quac aimed to recover inherent materiality and qualities trapped within. Quac was well acquainted with tradition and the challenges of contemporary art thus succeeding in adopting ideas and methods of East Asian culture to create a new kind of practice.
Although Quac continuously created innovative works and was receptive to new trends and methods of paintings, he did not receive the acknowledgement he deserved within the Japanese society perhaps due to his identity as an ethnic Korean. However, Quac spent the majority of his life in Japan due to the fact he believed it the only place that he could practice at the forefront of the avant garde.
Quac was born in Daegu before moving to Japan in 1937. He graduated from the Tokyo University of the Arts in 1941. During his early career, he showed at many international venues such as Tokyo International Biennale in 1965, São Paulo Biennial in 1969, and Sydney International Biennial in 1976. His first solo show in Korea was held at Gallery Hyundai in 1982. He has two major retrospectives in Korea at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1985 and most recently in June 2019 to celebrate the centennial of his birth.
“우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질이 존재하고 있다. 그 많은 물질마다 말을 하게 해서 무수한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면, 현재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일이 생기게 될지 모른다. 물질이 하게 하는 건 최대의 행위가 될 것이다. 나는 일체의 표현 행위를 멈추고 사물이 하는 말을 들으려 한다.”1)
곽인식은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 미술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구상화부터 초현실주의, 앵포르멜, 모노크롬, 아상블라주까지 폭넓은 작업 세계를 구축했다. 돌, 유리, 종이, 놋쇠, 철판 등 일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오브제를 재료로 선택하면서 유년 시절 고국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향해 애정을 드러냈다. 그의 선구적인 실험 정신은 1960년대 후반 자연 재료와 공업용 소재를 결합한 일본의 예술 경향 모노하(物派, Mono-ha)에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곽인식은 모노하와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를 논할 때 중요하게 회자되고 있다. 만년에는 일본 종이 화지(和紙) 앞뒤에 담채의타원형 색점을 무수히 찍어나가는 회화를 제작했다. 만물의 근원적 형태인 점, 선, 원과 색점이라는 보편적 조형 언어에서 독창성을 창출했다.
곽인식은 1919년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에서 부친 곽수덕과 모친 정악이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대 조선 사회 전반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고 신교육 보급이 확대된 시기에 유년기를 보냈다. 보통학교 4학년 그의 그림 실력을 칭찬한 일본인 선생님의 격려 덕분에 미술에 관심을 키웠고, 1934년 현풍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해 서울로 유학을 떠나 YMCA 부속 청년학관에 들어갔다. 1937년 형 곽원식이 체류하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했다. 1940년 제10회 <독립미술협회>에 <모던걸>(1939), 1941년 제11회에 <미완성>(1941)을 출품해 잇달아 입선하면서 1942년 대구역 근처 미나카이(三中井) 화랑에서 <제1회 곽인식 양화전>을 열었다. 1942년 전쟁을 피해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1945년 현풍면에서 해방을 맞아 초등학교 교사 박을덕과 가정을 꾸리고 1947년 서울에서 아들 경직(炅直)을 낳았다. 그러나 1950년 친형이 밀항선에 탑승하지 못하고 피살되자 포항에서 밀항을 돕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그는 혼자 일본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51년 도쿄에서 공모전을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아버지에게 붓글씨를 배우면서 그림을 좋아하게 된 곽인식은 일본에 살면서도 고국에서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물놀이 경험은 수묵화와 자갈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곽인식은 1988년 도쿄에서 68세로 작고했다.
곽인식의 예술 세계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작품 경향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1940년 <독립미술협회>에 <모던걸>을 출품하면서 작가로 등단하고, 일본 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는 일본 현대미술의 주요 전시에 참여하면서 사물의 구조와 관계를 추적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인체를 변형해 점, 선, 면의 반복과 분할, 직선과 곡선의 조화가 어우러지는 추상화를 제작했다. 제1기 작품은 당시 대다수 일본인 화가들처럼 추상과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제2기는 1960년대부터 1975년으로 작업에서 행위가 부각되고 물성이 드러나는 시기다. 원색의 물감에 석고를 발라 두터운 질감을 표현하고, 캔버스에 바둑알, 철사, 전구 등을 부착하며 재료의 물성에 주목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깨진 유리를 사용한 연작이 1961~63년에 집중적으로 제작됐다. 겉으로 보면 자연스럽게 깨진 유리 같지만,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유리를 깨트린 다음 그 파편을 다시 평면에 붙여 본래의 상태로 환원시키고 유리의 존재를 고찰한 작업이다. 유리는 1960년대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 흐름에서 대량 생산된 공업 제품을 상징한다. 그는 유리를 재료로 사용하며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원’이 주요 조형 언어로 그려지면서 화면이 점차 단순해졌다.
1976년 이후 제3기로 넘어오면 돌, 도기, 나무를 활용한 작업을 소개한다. 강에서 주워온 돌을 쪼개 자연석에 붙이거나 점토를 만들고, 나무에서 탄생한 먹을 다시 나무에 칠하는 등 자연의 순환을 연상시키는 작업을 제작했다. 자신의 자연관과 생활관을 바탕으로 만물을 작업의 재료로 삼고, 물질의 성질을 연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60년대 도쿄 서부 타마 지역으로 작업실을 이사한 후 10년 정도 머물다가 파리에 갔는데, 그곳에서 서양 현대미술을 경험하고 자극을 받아 판화를 시작해 1977~79년 본격적으로 판화 제작에 주력했다. 말년에 이르면 돌, 금속과는 반대로 약하고 무른 종이가 주재료로 사용된다. 처음에는 수묵 위주였으나 점차 다채로운 색상과 구성으로 나타나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겹겹이 포개진 무수한 색점은 평면에 깊은 공간감을 연출한다. 물의 퍼짐 효과를 이용해 앞면에서 뒷면까지 안료가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유도하면서 물감과 분리될 수 없는 화지의 성질을 극대화했다. 종이 작업은 폐암으로 작고하기 직전까지 곽인식의 마지막 역작이 됐다.
곽인식은 작고 전 1982년 갤러리현대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국내 첫 회고전이 열렸고, 2019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순회했다. 도쿄 갤러리Q(2018), 갤러리신라(2017), 갤러리현대(2014), 광주시립미술관(2002), 도쿄 하네기뮤지엄(1994)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요미우리신문 주최 앙뎅팡당전(1954), 미술문화협회전(1955), 아사히신문 주최 신인선발전 신인상(1956), 샌프란시스코미술관 주최 미국월드프린트전(1983) 등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1) 곽인식, 「New Art/New Technic」, 『미술수첩』, 도쿄, 1969.7., p.45.